프로이트의 ⌜두려운 낯설음⌟ – Unheimlich

https://www.theparisreview.org/blog/2019/09/05/the-uncanny-child/

프로이트의 ⌜두려운 낯설음⌟은 1919년 가을에 발간되었다. 이 글은 독일어 사전의 항목을 인용하는 독특한 서술 방식을 채택한다.

두려운 낯설음은 영어로 Uncanny로 번역되며, 그는 이 글을 통해 정신분석학적 이중성의 사유를 전개함과 더불어 에른스트 옌치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불쾌한 골짜기라는 공학적 개념이 흥미롭게도 이 글과 관련이 있다.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란 일본의 공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제시한 개념으로서 로봇이 인간과 유사성을 가질수록 친밀감을 지니지만 미묘한 차이로 인해 불쾌감을 유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 FriedC – File:Mori_Uncanny_Valley.svg by Smurrayinchester, wikipedia

위의 그래프의 자료를 해석해본다면, 인간과 유사할수록 호감도는 상승하며 대상의 움직임 여부에 따라 다른 그래프 양상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래프의 핵심적인 부분은 대상이 인간과 매우 유사하지만 완벽히 유사하지 않을 경우에 그래프가 급격히 하강하며 골짜기 모양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공학적 개념의 배경에 어떠한 정신분석학적 논의가 이루어졌는지 본격적으로 프로이트의 ⌜두려운 낯설음⌟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두려운 낯설음⌟에 등장한 미학

프로이트는 글의 시작에서 정신분석가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미학에 속하지 않고 미학이 길들일 수 없는 감정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개념화, 상징화한다는 것은 명확한 차이를 바탕으로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길들인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미학이 길들였던 것들은 일치, 조화, 매혹과 같은 감정들이다.

프로이트는 미학에서 논의하지 못했던 감정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자 하는데, 두려운 낯설음도 미학이 명확히 개념화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또한 프로이트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이는 혐오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경향성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그는 미가 이데올로기로서 무언가를 숨기고 억압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두려운 낯설음과 이중성

두려운 낯설음은 독일어로 Unheimlich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Unheimlich라는 단어는 Un + heim + lich 로 나눌 수 있다. Un은 부정의 접두사이며, heim은 고향, 친숙함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lich는 명사를 형용사화하는 접미사이다.

그래서 Heimlich라는 단어는 고향 같은, 친밀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Unheimlich는 이러한 단어들의 반의어이다.

그는 독일어 사전의 용례들을 살펴보면서 Heimlich라는 의미가 반의어인 Unheimlich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9. 위에서 살펴본 <숨어 있는>, <위험한>이라는 의미는 변화를 계속해 마침내 heimlich라는 말은 흔히 unheimlich라는 말에 부여되던 하던 뜻을 얻기에 이른다.

–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中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도 영어 단어인 <canny> 속에서도 비슷한 다의성을 찾을 수 있는데, 이 단어에는 안락하고 편안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오묘한 마술의 힘을 부여 받았다는 의미도 있다.

편안하고 안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 속에서도 규명되지 않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데, 프로이트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접두사 Un에 괄호를 쳐 단어를 나타낼 수 있다.

(Un)heimlich는 친밀함(heimlich) 속에 친밀하지 않음(Unheimlich)를 이미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가장 주요한 의미를 와해시킬 수 있는 것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는 자기차이를 지닌다.

즉, 이중성을 지녔다는 것은 자기차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며 이는 개념화가 완벽히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렌스트 옌치의 지적 불확실성

에렌스트의 옌치는 두려운 낯설음이 지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보았다.

대표적으로 밀납 인형, 마네킹, 자동 인형들에게서 받는 인상과 더불어 또한 간질 발작이나 미친 사람들의 행동들을 예로 든다.

위와 같은 대상들에 대해 두려운 낯설음과 같은 공포감을 느끼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모호한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옌치는 우리가 대상에 대해 파악하는 지식이 늘어날수록, 공포를 느끼는 대상들이 인간이 아님을 명확하게 알수록 두려운 낯설음은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옌치는 E.T.A 호프만의 『밤의 이야기들』에 수록되어 있는 ⌜모래 인간⌟이라는 소설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논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고 프로이트가 자신의 주장을 논증한 것이 ⌜두려운 낯설음⌟의 주요한 주제이다.

E.T.A 호프만의 ⌜모래 인간⌟

⌜모래 인간⌟의 간단한 줄거리는 주인공 나타니엘이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트라우마에 지속적으로 시달린다는 내용이다.

트라우마는 모래 인간이라는 설화의 구도를 공유하고 있는데, 모래 인간은 잠을 자지 않는 아이들을 찾아와서 눈알에 모래를 뿌리고, 눈알을 뽑아 자신의 아이에게 먹인다는 이야기이다.

어머니는 어린 나타니엘을 재우기 위해 모래 인간의 이야기로 겁을 주어 침실로 들어가게 하였고, 하녀는 그에게 모래 인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준다.

이후 변호사 코펠리우스가 등장하였는데, 나타니엘에게 있어 코펠리우스는 무서운 모래 인간과 같았으며, 이후 폭발 사고가 일어나 코펠리우스와 아버지가 함께 죽는다.

나타니엘은 성장한 후에 코폴라라는 안경 상인에게 망원경을 사게 되고, 망원경으로 이웃집 교수 스팔란차니의 자동 인형인 올림피아를 몰래 훔쳐보며 빠져들게 된다.

올림피아의 기계 장치를 설계한 것은 스팔란차니였고, 그 기계 장치의 눈을 넣은 것은 코폴라였다. 그리고 그 둘은 다투게 되고 올림피아는 피를 흘리며 산산 조각 나게 되며, 이를 목격한 나타니엘은 발작을 일으킨다.

나타니엘이 발작에서 깨어난 후 약혼녀와 함께 높은 첨탑에서 올라가서 코폴라 망원경을 통해 광경을 보는 순간 변호사 코펠리우스의 환영이 나타나 결국 나타니엘은 난간에 몸을 던져 죽게 된다.

옌치는 올림피아가 자동인형이라는 것을 작가가 모호하게 서술하고,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하여 독자로 하여금 모호한 상태에 빠지게 하였기 때문에 두려운 낯설음이 유발된다고 분석하였다.

프로이트의 거세 컴플렉스

프로이트는 ‘눈’을 중심으로 ⌜모래 인간⌟을 요약하면서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변호사 코펠리우스, 안경상인 주제페 코폴라, 교수 스팔란차니의 모습에는 모래 인간의 모티프가 반복된다고 분석한다.

곧이어 그는 이를 ‘거세 컴플렉스’로 명명한다. 거세 컴플렉스란 눈을 뽑는다는 행위, 즉 시각의 상실이 곧 죽음에 이른다는 두려움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설화에서 오이디푸스는 태어날 때 아버지를 죽인 후 어머니를 아내로 삼는다는 신탁으로 인해 버림 받지만 기어코 살아남아 예언에 따라 모든 행동을 저지르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오이디푸스는 눈을 뽑은 후에 죽을 곳을 찾아 떠나는데, 오히려 이는 죽음보다도 못한 삶을 살게됨을 암시한다. 사마천의 궁형(거세)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프로이트는 나타니엘이 어린 시절에 들었던 모래 인간의 설화는 억압의 과정이며, 모래 인간은 거세를 집행하는 자라는 것으로 설명한다.

모래 인간에 대한 두려움, 억압된 것이 반복된 형태로 삶 속에 회귀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에 대한 논의의 연장선으로 트라우마는 비의도적이고 반복된 형태로 등장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프로이트를 넘어서

Unheimlich에 대한 분석으로 돌아가면, 프로이트는 완벽한 이론화가 불가능한 지점을 발견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떠한 개념의 자기차이와 불가능성을 발견하고도 그는 욕망으로 인해 두려운 낯설음을 거세 컴플렉스로 길들이기에 이른다.

⌜모래 인간⌟에 대한 옌치와 프로이트의 요약도 그들의 욕망이 반영된 것이다.

직접 소설을 읽어본다면 지적 불확실성 혹은 거세 컴플렉스로 환원시킬 수 없는 지점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두려운 낯설음의 감정은 대상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불안이라는 의구심을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인간에게는 개념화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는 틈이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옌치의 지적 불확실성과 프로이트의 거세 컴플렉스도 인간 내면에 있는 원초적인 공포와 혐오스러움을 설명해내기 위한 지식에 불과하다.

지적 불확실성은 이중성을 없앤다면 해결될 수 있지만, 친밀함의 내부에 친밀하지 않음이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지식은 완벽하게 이중성을 제거할 수 없다.

우리는 친밀하지 않기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지만, 친숙한 공간 속에서 느끼는 낯섦은 명확히 정의할 수 없다.

아래는 이와 관련된 예시이다.

<예시 1>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는 고향을 구하기 위해 고향을 떠난다. 그는 자신이 떠나며 상상한 환상속의 안락하고 친밀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며, 이를 위해 많은 역경을 극복해낸다.

결국 그는 여정을 마친 후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고향은 그대로이지만 그는 낯설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의 동료인 샘은 정착하지만 결국 프로도는 다시 고향을 떠난다.

<예시 2>

카프카의 소설에서 유령은 항상 집에서 등장한다. 집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친밀한 공간이다.

하지만 가장 친밀한 공간에 확인되지 않은 정체불명의 낯선 자인 유령이 등장한다.

<후기구조주의, 라캉의 관점에서 바라본 두려운 낯설음>

<개인적 견해>
프로이트 역시 지식으로 규명할 수 없는 지점을 발견하고도 컴플렉스로 환원하고자 한다. 이를 보면 사태에 대한 객관적 진술이란 가능한가에 대한 의구심을 안겨주기도 한다. 짧은 식견이지만, 이러한 라캉적 사유의 밑바탕에는 관념론이 전제된다고 판단된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는 개념과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어떠한 관점이나 선입견을 통해서만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인데(관점의 극복을 위해서는 또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충분히 생각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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